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형양 · 성고 전역 (문단 편집) ==== 동진하는 항우 ==== 팽월의 이러한 움직임은 도저히 놔둘 수 없었기에, 항우는 '''서쪽으로 진군만 하면 승리할 수 있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동쪽으로 진군하게 되는 극도의 모순적인 상황에 빠지고 만다.''' 대신 항우는 자신이 없을 동안 성고를 맡을 대사마 [[조구]](曹咎)에게 '''"딱 15일만 기다려라. 내가 팽월 박살내고 올 테니까, 그때까지 유방이 싸움 걸어도 절대로 어울려 주지 말아라."''' 라고 신신당부하고 떠났다. 조구 외에도 [[사마흔]], [[동예]] 등도 성고에 남아 수비의 임무를 맡고 있었다. 이후 항우는 바쁜 만큼 즉시 이동하여 진류(陳留)[* 허난 성 카이펑 시 샹푸 구 천류 진. 삼국지에서 조조가 거병했던 곳이다.]와 외황에 공격을 퍼부었다. 하지만 [[공성전]]이라는 게 말처럼 쉽게 되는 게 아니라서 항우도 꽤 고생을 하고 며칠 걸려서야 외황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바빠 죽을 지경인데 쓸데없이 시간 낭비를 하게 되자 항우는 분노하여 '''"열 다섯 이상 먹은 사내는 모두 성 동쪽에 묻어 버려라!"''' 라는 환장할 명령을 내렸다. 꼼짝없이 [[신안대학살]]이 재현될 상황에서 외황성 현령의 가신의 아들인, 13살 나이였던 한 소년은 서초패왕의 앞으로 나아가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다. >"팽월이 강압적으로 외황을 위협하니 외황 사람들은 두려워 짐짓 우선 항복하고는 대왕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대왕께서 오셔서는 또 모두 생매장시키려고 하시니 백성들이 어찌 기탁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여기로부터 동쪽으로 양(梁) 지역의 10여 성이 모두 두려워서 항복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항우는 학살을 그만두었는데, 기가 막히게도 항우가 제나라 등에서 대학살을 자행할 때는 일치단결하여 항우에게 저항하던 백성들이, 항우가 자비를 보이자 '''이내 항복을 하기 시작하여 외황 동쪽의 수양(睢陽)에 이르기까지 모두 바쁘게 항우에게 항복하였다.''' 인덕이 무력을 이겨버린 사례. 항우가 이를 통해 무언가 깨달음을 얻었을 수도 있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항우가 없는 동안 성고에서는 이변이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